한국의 기업과 상인은 1990년대 초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으로 대거 건너갔다. 누루하치가 선양에서 청나라를 세운 뒤 만주의 중심지가 된 이곳을 무대로 새로운 터전을 닦기 위해서였다. 한국인이 선양으로 가기 시작한 지 14년, 선양 경제는 이제 한상을 제쳐놓고는 말하기 힘들게 됐다. 이곳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상은 2만명이 넘는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개인사업자에 이르기까지 한상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한상 경제벨트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국의 한인들은 “중국 내 한상의 역사를 알려면 선양으로 가라”고 말한다. 선양은 그만큼 초기 중국 진출 때부터 한상의 땀내가 배어 있는 곳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한상의 역사가 가장 깊은 선양의 서탑(西塔)거리. 이곳에는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져 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부터 여행사 미용실 사우나 술집에 이르기까지 벌여놓은 사업체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선양 한인회장을 역임한 안경찬(安敬讚) 동경체육용품 사장은 “선양의 한국인은 중국에서 생활한 기간이 긴 만큼 자신들을 ‘신 조선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선양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며 “선양의 한인사회를 보면 급격히 확대되는 중국 내 한인사회의 과거와 미래가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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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방직 이재환사장(왼쪽),동경체육용품 안경찬사장 |
◆선양으로 간 한상들=1992년 한중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서 한국인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은 선양이다. 일제 때 선양은 봉천으로 불렸다. 만주를 기반으로 한 독립군의 활동 거점인 이곳은 다른 도시와는 달리 한국인에게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곳인지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한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선양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 최대 거점 도시로 떠오른 칭다오(靑島)를 능가할 정도였다. 중국 동북지방으로 가는 한국인은 모두가 선양을 거쳐 갔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가 칭다오와 상하이 주변지역에 집중되면서 선양 진출 붐이 시들기는 했지만,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장기 체류자 1만여명을 포함해 2만명을 웃돈다. 선양의 번화가 중 하나인 서탑거리는 이들이 건설한 곳이나 다름없다. 서탑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아들인 황태극(皇太極)이 선양의 중앙(백탑·白塔)과 동서남북 네 곳에 세운 라마교 탑 중 하나다. 10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장화를 신지 않고 걸을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상이 진출한 후 상전벽해가 됐다. 이곳 주변에는 음식점을 비롯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개인 사업체만 200군데에 달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돈도 하루 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거리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소상인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나는 곳이다. 고급 한식당과 사우나를 갖춘 백제원과 현풍곰탕 같은 음식점, 유흥업소, 미용실, 상점, 중·소규모 무역상 사무실이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다. 안경찬 사장은 “떠오르는 중국에서 도전을 시작한 한국인이 만든 거리가 서탑거리”라며 “중국으로 오는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다른 도시에도 제2, 제3의 서탑거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양 동방방직의 이재완(李在完) 사장도 “선양에 투자한 대기업은 동방방직과 현대엘리베이터, 농심, 태평양 등 한두 곳이 아니다”며 “중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 이들 기업도 선양을 발판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양 농심의 조인현 법인장은 “서탑거리는 중국에 진출한 한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며 “이 지역이 안고 있는 과제는 현재 형성된 코리아타운을 더욱 건전하게 발전시켜 바른 한국문화를 중국에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자가 된 선양의 조선족=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200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지만, 중국에 개혁·개방이 시작된 뒤 이들은 하나둘 대도시로 옮아오고 있다. 선양에도 조선족이 많다. 선양이 과거 만주로 간 한국인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만큼 원래 이곳에 살던 조선족도 있었지만, 한중 수교 이후 동북지방으로 온 한국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자 다른 지역의 조선족도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선양에 사는 조선족은 10만∼12만명에 이른다.
선양의 조선족은 부자로 소문나 있다. 조선족 집단거주지인 만룽춘(滿融村)은 중국 내 조선족 마을 중 가장 부자동네로 소문나 있다. 선양의 한 조선족은 “만룽춘에 사는 조선족 중 80%는 한국을 다녀온 사람”이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가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서탑거리는 조선족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중국 화북과 동북 지역에 체인망을 갖춘 조선족계 한식당인 삼천리 본점도 서탑에 있다. 일부 조선족은 서탑거리 주변의 빌딩을 보유하거나 대형 유흥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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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서탑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족 시장. |
선양의 한국 기업 관계자는 “선양의 조선족 가운데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10% 정도”라며 “이들은 한상의 중국 진출을 계기로 돈을 벌어들였다”고 말했다. 일부 조선족은 외국인에게 부동산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때에 건물을 사들여 한국인을 대상으로 임대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최근에는 돈 많은 조선족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인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선족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도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돈 많은 조선족은 골프를 치면서 타당 100위안(약 1만2000원)씩 내기를 하는 경우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는 한상들도 함부로 하지 않는 큰 내기다. 중국 내 조선족 사회가 달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