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연맹체적 성격을 지녔으나 차츰 왕권의 부자세습 원칙 하에 안정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부여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와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왕은 여러 가(加)들을 대표하였으며 동시에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띠고 있었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을 자치적으로 다스리면서 왕을 보좌하였다. 가(加)들은 또한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왕과 여러 가(加)들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일종의 귀족회의체인 제가회의를 열어 일을 의논하였다. 제가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그 해의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부여의 중앙정부는 전국을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망을 통하여 여러 지역집단을 통할하였다. 이 큰 도로망을 사출도(四出道)라 한다. 사출도는 마가·우가·구가·저가 등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여국의 지방 지배구조를 ‘윷’놀이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부여는 송화강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한 반농반목의 경제형태를 갖추었다. 부여 사람들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으며, 목축도 성행하여 말·소·돼지·개 등을 길렀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이나 부여의 기마풍습은 부여에서 목축이 성행하였음을 잘 말해준다.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며 이를 중국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자료출처:동북아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