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간에 걸친 일제의 조선지배는 그 성격의 변화에 따라 다음과 같이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10년의 강점 이후부터 3.1운동이 폭발한 1919년까지이다. 흔히 무단통치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일제가 식민지지배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으며 헌병경찰이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구석구석까지 통제했다.
제2기는 3.1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까지이다. 이른바 문화정치라 불리는 이 시기에 일제는 조선에서 식량을 다량으로 반출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고 해방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족분열정책을 시도했다. 그 결과 증산된 조선의 쌀은 일본의 미곡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조선인의 민족운동에서는 갈등의 양상이 나타났다.
제3기는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까지이다. 준전시체제기라고 볼 수 있는 이 시기는 일제가 세계대공황 등의 여파로 심각하게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을 되살린다는 명목 아래 농촌진흥정책과 광공업개발정책을 추진했다. 만주사변 전후에 조선에서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고양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나 일제가 만주국을 수립하는 등 대륙침략에 노골적으로 나서자 사회전반에서는 이에 편승하여 한몫 잡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제는 이런 경향을 이용하여 만주와의 연결을 강화하고 군사 우위의 지배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제4기는 중일전쟁부터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이다. 전시체제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로 재편하기 위해 공업화정책을 추진하고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개조하여 전쟁에 동원하는 정책을 강행했다. 그리하여 조선인은 민족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한반도는 전시총동원의 광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위와 같은 시대구분에 입각하여,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이 단계별로 어떤 특징을 띠고 전개되었는가를 차례대로 개관해 보기로 한다.
1910년대의 조선지배는 헌병경찰을 구사한 무단통치와 조선총독부를 통한 식민지지배기반의 정비라가 그 핵심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폐멸한 후 한반도 지역을 '조선'이라 칭하고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면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조선총독으로 하여금 식민통치를 수행하도록 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에 준하는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핵심 요직은 물론이고 지방의 말단관직에까지 일본인을 파견하였다. 조선인 관리는 주로 하위직에 배치되었는데 진급과 월급 등에서 일본인보다 못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조선에서는 조선인의 의사를 반영할 만한 의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통치에 관한 각종 법률과 명령은 조선총독의 이름 아래 일본인 관료의 의지대로 제정되고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은 일제에 협력적인 조선인도 참가했는데, 1919년까지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따라서 식민지 처지라 하더라도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직접지배는 영국에 의한 인도의 간접 지배와는 그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철저히 억압적이고 조직적인 데 반해 후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엉성했다.
일제는 합법적인 조약을 가장하여 대한제국을 폐멸시켰지만, 실상은 무력에 의한 철저한 탄압과 협박을 통해 식민지화를 관철시켰다. 일제는 러일전쟁(1904-05년)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조약체결을 강요하여 행정권과 사법권 등을 차례로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주권손상에 저항하는 고종황제와 관료를 협박하고 회유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단 폐멸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전국 각처에서는 비밀결사의 형태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의 전통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을 통해 물샐 틈 없는 지배망을 구축했다. 헌병은 경찰을 지휘하는 체제로 개편하여 군대가 일반인의 생활까지도 통제하는 삼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헌병경찰은 일정한 범죄에 대해서는 재판 없이 조선인을 구금하거나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전근대 사회에서나 존재했던 태형제도를 운용하기도 했다. 흔히 무단통치라 불리는 이런 강압적 지배는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중추를 이룬 것이 일본의 육군이었으므로 역대 조선총독은 현역의 육군대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제는 1910년대에 조선에서 상공업의 발달을 억압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조선은 일본 본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광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인접한 조선에서 상공업이 발달하면 일본의 상품판매와 식량조달에 차질을 가져오거나 일본자본의 진출과 충돌할지 모른다고 일제는 우려했다. 또 조선의 민족자본이 성장하면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세력이 그만큼 강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런 취지 아래 일제는 회사령을 발포하여 시행했다. 회사령의 골자는 조선에서 회사를 설립할 경우에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차별이 공공연한 상황에서 자본규모가 영세한 조선인 자본이 불리한 대접을 받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실시한 경제정책 중에서 더욱 괄목할만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통감부 시대에 이미 대한제국이 실시한 토지조사와 토지소유권 정비 사업의 실적을 이용하여 각종 증명제도를 마련했다. 일본인이 이미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롭게 토지를 사고팔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증명제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지모·지목을 파악하고 소유권을 확정하여 등기하는 사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많은 땅을 국유지로 만들어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귀속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국책회사에 불하하였다. 또 일본인이 자유롭게 토지를 매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본인은 급속히 지주로서 성장한 반면에 영세한 조선인은 쉽게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 현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지는 전체 경작면적의 4.2였고, 일본인 개인의 소유지는 7.5%였다. 그 결과 일본인은 대거 조선으로의 이입하고, 조선인은 만주나 일본으로의 이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촌의 지배를 관철한 일제는 일본인의 구미에 맞는 식량과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농사개량사업을 추진했다. 일제는 일본식의 농법과 품종을 보급하고 면화재배와 누에고치 생산을 독려했다. 그리고 광업의 개발을 통해 석탄과 철광 등을 반출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점차 일본을 위한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로 재편되어 갔다.
일제의 금융지배는 조선경제의 혈관을 장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06년에 각지에 설치했던 농공은행을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으로 통합 개편하였다. 그리고 각지에 금융조합을 설치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하여금 금융업도 겸하도록 했다. 금융기관의 정상에는 조선은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은행은 식민지의 중앙은행으로서 발권업무와 국고취급을 겸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 금융기관을 통하여 조선의 재정과 금융을 종합적으로 지배했다.
일제는 토지조사업과 더불어 임야조사업도 실시하여 마을 공용의 임야 등을 조선총독부의 국유림으로 재편하였다. 또 철도에서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 등을 건설하여 일제의 지배기반을 전국으로 확산하고 조선에서 생산되는 식량 등의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간선을 확보했다. 일제의 교통기관 장악은 조선의 신경조직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자료출처:동북아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