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정부는 혁명공약으로 국민의 생활고 해결과 경제의 자립화를 내걸었던 만큼 민주당 정부보다도 일본의 자본을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5·16 당시 20%를 훨씬 웃도는 실업률과 230만 명이 넘는 실업자, 저급한 농업생산성에 의한 식량부족, 만성인플레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생활고 등으로 남한 사회는 회생하기 어려운 경제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군사정부는 출범 후 즉시 경제재건을 위한 계획수립에 착수했으며 1962년 1월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5개년 계획에 계상된 투자재원 중에 1966년까지 총 6억 8천만 달러를 외자재원으로 충당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 대부분을 미국과 서독 등으로부터 공공차관형식으로 자본을 유치하려고 했다. 이러한 외자재원은 기간산업의 정비와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쓰이기로 되어 있어 사실상 5개년 계획의 핵심재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 첫 해부터 예상한 만큼의 외자도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군사정부는 1962년에 들어서 일본으로부터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기본 작업으로 일본과의 수교타결을 서두르게 되었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이 남한에게 일본이 제공할 자금에 대해서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자금(장기정부차관) 2억달러로 합의한 것을 계기로 양국의 수교교섭은 타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한일 수교교섭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미국의 권유도 크게 작용했다. 군사정부가 들어서는 시기는 동북아시아를 둘러싸고 냉전구조가 정착되어 가던 시기였다.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러스크(D. Rusk) 미국무장관이 일본을 경유하여 남한을 방문하여 동맹결속을 확인하고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종용했다. 그는 박대통령에게 “월남이 위험한 상태에 있는데 만약 남한에서도 실패하게 되면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했으며 악화된 경제를 재건하는 일은 경제개발계획의 결과에 달려 있고 특히 남한이 제안하는 대일 청구권은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경제재건에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하며 조속한 청구권교섭의 타결을 촉구했다고 전해진다. 60년대 중반에 들면서 한미방위협정과 미일방위협정을 양축으로 하여 미국 주도의 반공동맹체제가 견고해지고 있었으며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남한과 일본을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동맹체제에 더욱 긴밀하게 끌어들였다. 이와 함께 한일양국의 관계개선에 대한 미국의 입김도 강해졌으며 이러한 미국의 지지와 권유가 우리 정부의 대일교섭 추진에 청신호가 되었다.
한일 양국은 수교교섭을 활발히 진행시켜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하는 4개의 협정을 조인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대일수교를 단행한 것이다. 한국측은 청구권자금을 얻는 대신에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보상을 유보했다. 특히 한일기본조약에서 과거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의 구조약에 대해 양국의 인식차이를 “이미 무효이다” 라는 애매한 문구로 처리함으로써 양국이 식민지 지배의 법적 효력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남한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로부터 과거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수긍하는 태도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액수의 청구권자금을 얻어내기 위하여 민간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보상을 요구했다. 1961과 1962년의 6차회담 과정에서 한국측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103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일본측에 이에 상응하는 보상액을 요구했다. 그러나 70년대에 한국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보상은 재산권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인적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사망자 8,552명에 지나지 않았다.
(자료출처:동북아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