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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상하이탄 <13회>:화가 단단히 났는지 입에서 모국어가…
북경시간: 2006-09-09 16:15:41 
 

"나인!"
옥환이 지금껏 사용하던 중국어 대신 싫다라는 뜻의 독일어 나인(Nein)을 입에 올렸다. 모친이 결혼 상대로 한번 만나라고 권하는 남자를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진짜 단호한 표시였다.

   
  ▲ 그림=이용호 화백  
 
"이 계집애가 정말!"
강여사 역시 화가 단단히 났는지 중국어가 아닌 모국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드물게 보는 상하이(上海) 출신의 조선족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 없어요. 나는 정말 이대로가 좋아요. 나중에 좋은 자리 나오면 학생들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고 싶어요. 그거나 아버지한테 좀 적극적으로 알아보라고 그러세요.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니 자격은 충분하잖아요"

옥환은 모친의 화를 다소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돌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듯 교수 채용과 관련한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모친이 화가 무지하게 나면 곧잘 모국어로 말하는 버릇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거야 결혼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니니. 지금 그 사람은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는 장래 유망한 청년이야. 집안도 엄청나고.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대학 교수 자리는 바로 나올 거야, 아마"

강여사의 어조가 웬일인지 부드러워졌다. 대학 교수 자리에는 집착이 지나칠 정도인 딸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사위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청년의 배경이 딸의 마음을 움직일지 모른다는 다소 세속적인 생각도 급기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옥환의 결혼에 대한 반감은 거의 철옹성 그것에 못지 않았다.

"아니 내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뭐하러 남의 도움을 받아요. 아버지가 좀 도움을 주시면 모를까"
"어휴! 앓느니 죽지, 죽어.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 혹 다른 남자가 있는 거 아냐"
강여사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다시 화를 버럭 냈다. 참을 때까지 참았다는 생각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주체치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되면 딸이 아니라 거의 애물 단지였다.
"남자는 무슨…"

옥환이 강하게 부정하려다 말고 갑자기 주춤했다. 모친이 아무 의미 없이 던진 한마디 말이 갑자기 가슴 저 밑바닥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웬 남자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무려 9년 동안이나 끊임 없이 자신의 이성에 관한 감정을 완전히 지배했던 바로 그 남자를.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귀국을 전후해 너무나 바빴던 탓에 아주 순간적이나마 희미한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 있게 만든 남자의 얼굴이 어느새 망막에 서서히 맺혀가고 있었다.

"남자라, 남자! 그래 나한테는 그 남자가 있었지, 내 목숨 이상으로 사랑한 그 사람이. 야속한 사람 같으니…아, 헤어진지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 그러고 보니까. 휴!"

옥환은 눈을 감은채로 독백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가슴이 아려 왈칵 쏟아질뻔한 눈물을 겨우 참다보니 한숨 밖에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러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이기를 바라면서 1년여간이나 목숨 바쳐 사랑한 남자와의 추억을 뇌리에서 서서히 끄집어내는 노력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모친의 시선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웬만한 중국의 중산층 정도의 재력으로는 쳐다보는 것조차 언감생심인 3층이나 되는 강여사의 상당히 고급스러운 타운 하우스는 돌연 깊은 정적에 휩싸이고 있었다.

(홍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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