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서는 속이 뜨끔했다. 옥환은 1년전 막 만났을 때 재서의 하우스 미하엘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목격한 야릇한 광경을 아직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떤 변명으로 그녀의 마음을 다독거려야 할지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지내…나요?"
"……"
"잘…있나요?"
"자비네? 자비네는 잘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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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용호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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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서가 잠깐 망설인 끝에 불쑥 대답을 뱉어냈다. 자신이 생각해도 썩 좋은 답은 아닌 듯 했다. 그렇다고 이미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솔직해지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으로 말을 이어갔다.
"여학생이기는 해도 같은 기숙사의 친구로 친하게 지냈으니까 가끔 소식도 들려와. 본인도 가끔 연락을 해오고. 지금은 고향 뮌헨의 부모님 병원에서 마지막 실습중이라고 하더군. 졸업한 후에는 아마 인턴이나 레지던트 과정 역시 그쪽에서 밟지 않을까 싶어"
"……"
옥환은 재서의 안하느니만 못한 한심한 변명에 침묵을 지켰다. 아직도 3개월여전 고향으로 떠난 자비네의 소식을 아주 잘 듣고 있다는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는 표현이 딱 좋았다. 아무리 통이 큰 듯 해도 역시 옥환은 순백의 깨끗하고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는 나이 어린 소녀같은 여자가 분명했다.
"샤오환, 기분…상했어?"
"……"
"진짜 그런…거야?"
"……"
"이거 봐, 샤오환! 자비네는 진짜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절대로 아니야. 제발 마음 좀 풀어, 응!"
"……"
"이것 참, 내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
"그때 일도 그래. 당시에 이미 다 해명이 됐던 것 아닌가. 여드름 그 친구가 불러온 덩치들한테 맞은 상처가 도져 자비네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말을 다시 해야 해? 그때 자비네의 차림새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여기 독일 여학생들이 그런 차림을 다반사로 하고 다닌다는 사실은 샤오환도 너무 잘 알잖아. 하늘에 맹세하건대 절대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
"사실은 나는 그때 샤오환을 생각하느라고 우울증 비슷한 증세까지 앓고 있었다구.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어. 이제 마음을 그만 풀어, 샤오환!"
재서는 등에서 식은 땀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닌데다 1년전 옥환에게 한 거짓말을 다시 거론하려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자비네와 가진 부적절한 관계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내뱉은 데에 대해서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거짓말만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 그때 이후부터의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그의 열과 성을 다한 지극정성의 안간힘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굳게 닫힌 것 같은 옥환의 말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그래요. 알았어요, 쉬꺼! 내가 너무 옹졸했어요. 모두가 나하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의 일인데요, 뭐. 설사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다 이해하겠어요"
"고마워, 샤오환!"
(홍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