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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공원' 세계문화유산 신청으로 본 중국
Beijing time:2008-10-13 14:54:49 
 
중국이 최근 들어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중국 내에서 중국문화의 기원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함으로써 중국문화의 기원을 천년 이상 끌어올리려는 중국의 의도는 중국의 뿌리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1.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는 현재 중국 동북지구 신석기시대 문화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는 지금으로부터 5,000~6,000년 전 연산(燕山:이엔싼) 이북, 대릉하(大凌河:따링허) 및 요하(辽河:랴오허) 상류 유역에서 활동한 부락이 만든 문화다.

최초로 내몽고자자치구(内蒙古自治区:네이멍구쯔쯔취) 적봉시(赤峰市:츠풩쓰) 교외의 홍산(红山:홍싼)에서 발견되었고, 비슷하거나 같은 문화특징의 여러 유적이 발굴되어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라고 칭하고 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분포면적은 약 200,000평방킬로미터로 약 2,000년간 지속되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사회형태는 초기는 모계 씨족사회의 전성시기였으며, 주요 사회구성은 여성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사회였다.

후기에는 점차 부계 씨족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되었다.

경제형태는 농업위주로 목축ㆍ어업ㆍ수렵을 병행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유적은 독특한 특징의 채도와 갈 지(之:쯔)자 모양의 결 무늬 도기가 공존했으며, 아울러 세석기의 신석기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구리를 정련한 도가니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구리 제련업이 이미 생겼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는 중원의 앙소문화(仰韶文化:양싸오원화)와 동시대에 요하(辽河:랴오허) 유역에 분포되어 발달한 문명으로, 중원의 앙소문화(仰韶文化:양싸오원화)와 북방 초원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다원문화다.

이미 발견되고 확정된 이 문화계통에 속하는 유적은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 서부지구에 천 곳에 이르게 분포되어 있다.

여러 가지 유물과 함께 많은 동물모형의 옥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 돼지ㆍ거북이ㆍ새ㆍ매미ㆍ물고기 등의 형상이 있다.

2.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은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말기에 속하며, 지금으로부터 5,500~5,000년 전에 해당한다.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 조양시(朝阳市:차오양쓰) 경내의 능원시(凌源市:링위엔쓰)와 건평현(建平县:찌엔핑씨엔)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81년 발견되어 1983년 발굴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여신묘ㆍ제단ㆍ적석총은 중국 북방지역 사전문화(史前文化:스치엔원화)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며, 중국의 전문가들은 이로 인하여 중화문명 기원사와 중화고국사에 대해 새로운 방법을 진행하고 있다.

중화문명 기원사의 연구를 4,000년 전으로부터 5,000년까지, 중화고국사의 연구를 황하(黃河:황허) 유역에서 연산(燕山:이엔싼) 이북의 요하(辽河:랴오허) 유역까지 확대시켰다.

이 유적은 또한 여러 매스컴에서 선정한 "중국 20세기 100대 고고학 발견"에 포함되었으며, 세계 유명 고고학 전문가 주편(主编:주삐엔)의 『세계 100차 고고 대발견』의 극동부분에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은 중국에서 중화문명의 기원을 천년 이상 앞당긴 고고학적 발굴이자, 전설로만 존재했던 황제(黃帝:황띠)가 실제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의 세계문화유산

현재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은 선양(沈阳故宫:선양꾸꽁)ㆍ청나라 영릉(清永陵:칭용링)ㆍ청나라 복릉(清福陵:칭푸링)ㆍ청나라 소릉(清昭陵:칭짜오링)ㆍ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우위싼싼청)ㆍ구문구장성(九门口长城:지언우먼커우창청) 등 6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은 현재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이 6개로 제일 많은 성이며, 비록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해서는 많은 일을 해야 되지만,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의 가장 유력한 다음 세계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은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과 흥성고성(兴城古城:씽청구청) 두 곳이 이미 중국이 선정한 세계문화유산 예비명단에 들어가 있다.

4.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대표적 유적으로 꼽히는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은 1988년 중국 국무원이 공포한 전국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이 유적 제16지점에서 발굴된 고고자료는 중국 당해년도 10대 고고발굴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2004년 국가문물국(国家文物局:꾸어쨔원우쮜)에 의해 중점대유적보호명단에 올랐으며, 200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신청할 세계문화유산 예비명단에 편입되었다.

최근 들어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이 눈에 띠고 있다.

2008년 2월 18일 요녕성 조양시 위원회(辽宁省朝阳市委员会:랴오닝성차오양쓰웨이위엔훼이) 서기 진철(陈铁:천티예)는 "조양(朝阳:차오양)의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공원에 세계수준의 유적공원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 이전에 소집된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 성장(省长:성장) 업무회의에서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 보호전시 및 유적공원 계획업무 전문 테마를 발표했다.

그 후, 조양시(朝阳市:차오양쓰)는 성문화청의 지도사상에 의거하여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 보호전시 및 유적공원 계획요강을 제정하여 문물여행사업을 발전시키고,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을 세계문화유적으로 신청하기 위한 기초를 확립했다.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 문화청장 팽익민(彭益民:펑이민)은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며,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은 중화문명의 근원이고 중화인문의 시조이자 중화종교의 시조라고 하면서,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은 중화민족의 뿌리를 찾는 성지로 중화문명의 서광이 시작된 곳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양시(朝阳市:차오양쓰)는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에 대해 올해 대유적 보호항목과 관련된 업무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 유적이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5.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공원 건설계획

중국 지난 2월 28일에서 3월 1일까지 요심만보(辽沈晚报:랴오선완빠오)에 3회에 걸쳐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즉 요녕성(辽宁省:랴오닝성) 정부가 앞으로 3∼5년 내에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공원을 건설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하여 세계 중국인들이 선조에 제사를 지내고 복을 기원하는 성지로 조성한다는 것이다.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공원 보호항목의 건설계획 중에는 주위 50평방킬로미터 내에 10여 개의 전시구역을 만들어 하나하나 박물관처럼 조성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리고 유적공원 내에 제일 진귀한 것으로는 여신 두상이 꼽히는데, 그것은 중국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중국인의 선조"에 가깝다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에서 출토된 옥 등을 유적공원에서 유람객이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의 보호를 진시황릉 병마용 등급과 같이 하여 여신묘ㆍ적석총 등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의 대표적 유산은 보호 장치를 설치한다.

그리고 요녕성 조양시 능하가 4단 219호(辽宁省朝阳市凌河街4段219号:랴오닝성차오양쓰링허찌예쓰똰얼이지어우하오)에 위치하고 있는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연구원(辽宁省牛河梁红山文化研究院:랴오닝성니어우량홍싼원화이엔찌어우위엔) 및 조양우하량홍산문화연구원(朝阳牛河梁红山文化研究院:차오양니어우허량홍싼원화이엔찌어우위엔)에서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에 대한 연구 및 관련 업무를 대부분 주관하고 있다.

6. 중국의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 평가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은 1981년 발견되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기원전 3,500여 년에 초기국가 단계의 모든 조건을 갖춘 초기문명 사회였음을 입증하는 여신전ㆍ제단 및 적석총이 발굴되어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는 중국에서 역사의 대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는 장강(长江:창쨩)과 황하(黃河:황허)를 중심으로 형성된 용산문화(龙山文化:롱싼원화)와 앙소문화(仰韶文化:양싸오원화)가 중국역사의 기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러던 것이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가 발견되자 중국은 자신들이 예전에 변방지역이라고 하던 곳을 거기에 문명의 서광이란 타이틀을 내 걸었다.

왜냐하면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가 중원지역의 문화를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몽고자자치구(内蒙古自治区:네이멍구쯔쯔취) 적봉시(赤峰市:츠풩쓰) 홍산(红山:홍싼)에서 발굴된 C형 모형의 용은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옥기의 대표작으로 "천하 제일용"으로 부리고 있다.

적봉시(赤峰市:츠풩쓰) 내에서는 많은 용을 표현하는 옥기가 출토된 것으로 연구되어 적봉시(赤峰市:츠풩쓰)은 용의 고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래서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선인은 용의 후예 즉 한족(汉族:한쭈)이라고 믿고 있다.

중국은 특히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유적을 통해 하(夏:쌰)나라 이전 삼황오제(三皇五帝:싼황우띠) 전설의 실물적 근거를 찾아 중국 상고시대의 사회발전사ㆍ사상사ㆍ종교사 및 미술사 등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가 융성했던 신석기 후기 문화인 요서(辽西:랴오씨) 일대가 전욱 고양씨의 본거지인데, 이들이 중원으로 옮겨갈 때 그들 일부가 동쪽으로 이주해 고구려 선인이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와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유사성을 논거로 제시했다.

7.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통해 본 중국의 모순점

먼저 중국에서 주장하는 전욱 고양씨를 보면, 전욱 고양씨는 전설상의 인물로 실존 여부조차 불명확하다.

설령 실존했다 하더라도 기원전 2,500년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구려와 직접적인 계승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적석묘는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반면에 고구려 적석묘는 기원전 3세기~2세기에 만들어졌다.

즉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의 적석묘와 고구려 적석묘는 무려 3,000년 가까운 시간 차가 있으므로 양자를 연결해줄 유적이 없어 이 또한 연관을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적봉시(赤峰市:츠풩쓰)에서 발굴된 옥으로 제작된 C형 모형의 용에 대하여 살펴보자.

최근 중국 요서(辽西:랴오씨) 지역 청동기문화 연구자인 단국대석주선박물관 복기대 학예연구원은 백산학보 77집에 기고한 「홍산문화(红山文化) 원시용(原始龙)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국내 학계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용 문화의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 기원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는 중국에서 주장하는 용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용문화가 동이족에서 출발했다는 한국학계의 용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비판하며, 그는 그것이 용이 아닌 오히려 뱀이나 뱀장어 가깝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보면 중국 학계는 1990년대부터 고구려사의 출발점인 족속 기원을 한국사에서 분리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만을 위한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인 화이론(华夷论:화이룬)에 입각해 역사를 인식했다.

중원 대륙의 왕조만 문명화한 나라고 주변국은 미개한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화이론(华夷论:화이룬)에 따르면 중국사의 범주는 중원 왕조에 국한되며 주변 민족은 제외된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한족(汉族:한쭈) 등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다.

중국은 정부수립과 더불어 중국은 자고이래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였다는 논리를 세우고, 중국의 모든 민족 더 나아가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설정했다.

이로써 전통사관에 따르면 중국사에서 제외될 무수한 소수민족의 역사가 중국 영토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사로 둔갑했다.

즉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역사 주체의 계통을 무시한 채, 오로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의 귀속을 설정하는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인 것이다.

사실 중국은 80년대까지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파악했다.

아무리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이라 하더라도 고구려는 명확하게 한민족과 연결되고,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현재의 영토라는 자의적 기준만으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 선조가 중국 화하족(华夏族:화쌰쭈)의 후예라는 중국의 견해는 논거가 전혀 없다.

이는 고구려의 기원을 한국사에서 완전히 단절시켜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고 싶어 하는 중국의 희망 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중국이 영토 지상주의 역사론을 주장한다면 중국이 말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싼황우띠)는 언제 어디서 활동했는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홍산문화(红山文化:홍싼원화)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예전에 중원 위주로 해석하던 것을 확대해 해석한다면, 만약 이후에 러시아의 연해주가 중국의 영토에 편입되어 그곳에서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면 중국이 말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싼황우띠)는 연해주에서 활동했었다는 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치라면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그들의 역사범위가 안 된다는 보장이 없다.

또한 중국 정사를 보면 고구려는 당시 분명히 이민족 국가였지 중국의 왕조가 아니었다.

중국 최고의 정사로 불리는 사마천(司马迁:쓰마치엔)의 『사기(史记:스찌)』를 보아도 당시의 동북지방은 이민족의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선열전(朝鲜列传:차오씨엔리예쫜)」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기록한 『삼국지(三国志:싼꾸어쯔)』를 보아도 본기(本纪:번찌)에 고구려 등의 역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당(唐:탕)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旧唐书:찌어우탕쑤)』와 『신당서(新唐书:씬탕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모두 열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이 당시 동북의 역사를 그들의 변방 이민족의 역사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 최초의 정사인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轼)의 『삼국사기(三国史记)』를 보면 고구려의 역사는 열전이 아닌 본기로 기록되어 있다.

즉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문헌사료에서 공교롭게도 한국 뿐 만이 아니라, 중국 자신도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보고 있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사서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중국이 영토 지상주의 역사론을 내세워 역사를 기술한다면 결국 자신들의 조상이 기록한 역사를 자신들이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다.

만약 중국이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여 자국의 역사를 끌어 올리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남의 물건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를 끌어올리는 경우나 다름없다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중국의 중원문화의 경우, 우하량(牛河梁:니어우허량)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적석총 등이 없어 두 문화는 다른 문화라는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 지상주의 역사론이라는 결론에 맞추어 역사를 꿰맞추기 식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역사는 연구를 통해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지 결론에 맞추어 내용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이러한 갖가지 역사공정을 하면서 입으로는 평화를 외친다면 그 누구도 중국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또 중국이 중국 위협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은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우려를 느끼게 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현재 중국이 자국민에게 쓰고 있는 우민정책이 역사왜곡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의 이목과 수준을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 밖에 안 된다.

이 세계는 중국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중국은 제대로 인식해야 하겠다.

(김부식)

*주:본 문장은 2008년 3월 11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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